“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채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중략)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 故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황량함 가운데 뿌려진 복음의 불씨들
구한말, 성경은 금서였고 선교사들의 활동은 제한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토마스 선교사(R.J. Thomas, 1840~1866)는 두 번에 걸쳐 조선 전도에 나섰다. 1865년 첫 번째 전도 당시, 그는 서해안에 상륙해 두달여의 시간동안 해안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저는 조선의 수도인 서울까지 진출하려고 했지만 광풍으로 인해 목선이 파괴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에 뒤돌아선 그는 이듬해 제네럴 셔먼호를 타고 두 번째 전도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전도에서 그는 준비한 성경을 조선인들에게 전하고 순교한다. 이때 그가 전달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훗날 장대현교회를 세우고, 한국 기독교사에 대부흥을 일으키는 불씨가 됐다.
이 시기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전한 이로는 최초 한국 개신교 성도 중 한명인 백홍준(1848~1893, 평북 의주) 장로를 들 수 있다. 그는 1879년 만주에서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고 세례를 받았다. 같이 세례를 받은 이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고, 이 성경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후에 장로로 추대되어 열정적 선교사명을 감당하며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금교(禁敎)를 전한다는 이유로 의주에서 체포됐다. 체포 후 2년 동안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1893년 옥중에서 순교하게 된다. 백 장로가 바로 최초의 한국인 순교자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는 토마스 목사(혜촌 김학수 그림)
일제 치하에서도 순교 정신 꽃피워
일제강점기(1910~1945) 동안 한국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은 기독교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면 독립운동사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한 독립운동이었지만, 독립선언서를 제창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므로 이는 3·1운동의 주도권이 기독교 측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 수원 제암리교회의 집단학살사건을 비롯해서 강서사천교회, 정주교회, 북간도 노루바위교회, 서간도의 여러 교회 학살사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가혹하고
처참한 박해였다. 3.1운동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피해상황을 보면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사이에 발생한 교회 파손이 47건이었고,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까지의
피해상황은 교회소각이 57건이었다. 순교자들은 통계상 50명으로 측정됐으나 아직도 자료가 발굴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잘 알려진 순교자로는 이기풍 목사가 있다. 이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해 1907년 제1회 장로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기풍은 한국 최초
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됐다. 일제 치하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존립을 흔드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이 목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굳건한 신앙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77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또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앞에 맞섰다. 주 목사는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면서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 악화됐지만 감옥에서도 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드렸다고 한다.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1944년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라고 고백하며 웃는 얼굴로 운명했다.
민족상잔의 비극, 복음이 살려내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펼쳐졌던 1950년대 역사 속에도 신앙의 선배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다. 이 기간 중 순교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통계상 200여명이라고 한다. 당시 순교자로 기록된 인물 중에는 헌신적인 사랑 실천으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가 있다.
손 목사는 애양원을 설립해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다 6·25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아들을 죽인 공산군을 사랑으로 품어 양자로 삶은 그의 신앙은 후대에 지금도 큰 충격을 안기고 있다.
또 그 당시 전라남도 신안의 문준경 전도사가 있다. 문 전도사가 걸었던 순교의 자취로 증도는 현재 복음화율이 90%다. 결혼 직후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목포에 있던
중 복음을 접한 그는 신안의 여러 섬마을을 찾아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헌신적인 신앙의 길을 걸었다. 비록 그의 목숨은 6·25 전쟁 도중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했지만, 그의 생명은 다른 이들을 살리는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한편 신앙 절개를 굳게 지키다 인천경찰서 감방에 수감되어 모진 옥고를 치르다 순교한 김규흥 장로가 있다. 그가 있는 곳은 어디건 복음의 전파 현장이었다. 그의 순교현장인 인천경찰서는 패퇴하는 공산군에 의한 참혹한 떼죽음의 학살현장이었는데, 그는 총살됐던 현장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묵묵히 찾았던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교회를 지킨 순교자들
지금 우리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피 값으로 지킨 주일 예배시간임에도 상당수 성도들은 예배자리를 지키지 않은 채 외부로 떠나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또 자유주의, 개혁주의 신학사상들이 오용되어 교리를 흔들기도 하고, 무분별하게 난무하는 이단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 한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박해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는 사회의 많은 비판을 받는다. 일례로 몇 년 전 중동지역에 단기선교를 다녀온 모교회 성도들은 그곳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되어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음에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믿는 자로서 삶을 반성하고, 어떻게 신앙을 지켜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간이다.
100여년 전,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 마포삼열)박사는 에든버러선교대회에 참석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현재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이지만 가장 먼저 복음화 될 땅입니다.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과 같이 군사 또는 상업 강국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국이 기독교 국가, 영적 대국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은 동방의 영적 강대국이 되어 중국과 일본, 더 나아가 러시아에까지 영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작고 희망이 없던 나라가 동방의 예루살렘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영적 강대국을 꿈꾸었다. 그리고 단언할 수 있는 건 목숨을 바치면서도 순종하고 희생한 순교신앙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 이 신앙의 열매로 한국교회는 100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을 수 있었고, 순교자의 흘려진 피 위에 한국교회의 터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아는 우리는 새로운 한국 교회 100년을 향해 믿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아간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과 영적 도약의 신호탄으로! 순교신앙을 가슴에 안고.
글 사진 SRC
경기도 용인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2024.04.26